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보스 연설에서 풍력발전을 “패자(losers)”라 비난하며 이를 도입하는 국가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한 지 불과 닷새 만에, 유럽 9개국이 북해에 초대형 해상풍력 허브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이 화석연료 중심 전략을 강화하는 사이, 유럽은 재생에너지를 에너지 안보의 핵심 축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영국은 지난 1월 독일에서 열린 ‘북해 정상회의(North Sea Summit)’에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들은 100기가와트(GW) 규모의 해상풍력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청정에너지 허브’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약 5천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생산된 전력은 고전압 해저 케이블을 통해 각국 전력망과 연결된다.
이번 합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직접적 대응은 아니지만, 미국과의 에너지 관계가 점차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유럽의 전략적 자립 의지를 드러낸 조치로 평가된다. 국제정치 전문가 티스 반 데 그라프 겐트대 교수는 “미국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같은 산유국과 유사한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은 자국 내 화석연료 자원이 제한적이며, 기존 생산도 감소세다. 네덜란드의 대형 가스전은 지진 문제로 축소 운영 중이고, 북해 유전·가스전 역시 노후화로 생산량이 줄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EU)은 전체 에너지의 약 60%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는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다.
특히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가스를 ‘무기화’하면서 유럽은 에너지 가격 급등과 생활비 위기를 겪었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는 과정에서 유럽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급격히 늘렸다. 2025년 현재 유럽 LNG 수입의 약 60%가 미국산이다. 이는 단기적 대안이었지만, 가격 변동성과 정치적 리스크를 동시에 노출시켰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을 상대로 대규모 에너지 구매를 압박해 왔다. 유럽은 연간 2,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석유·가스·원자력을 3년간 추가 구매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미국은 글로벌 탄소세 논의를 무산시키고, 국가안보 전략 문서에서 에너지 수출을 ‘권력 투사 수단’으로 명시했다. 그린란드 영유권 요구까지 겹치며 대서양 동맹에 균열이 감지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재생에너지는 단순한 기후정책을 넘어 에너지 주권과 직결된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다. 북해는 얕은 수심과 강한 바람 덕분에 해상풍력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평가된다. 반 데 그라프 교수는 “북해는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해상풍력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2025년 기준 EU 전력 생산의 30%는 풍력과 태양광에서 나온다. 특히 풍력은 전체 전력의 19%를 차지하며 화석연료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가 더 이상 ‘대안’이 아니라 전력 시스템의 “새로운 기반(backbone)”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과제도 존재한다. 원자재 가격 상승, 노동비 증가, 투자 위축 등으로 재생에너지 산업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풍력·태양광 프로젝트를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그러나 유럽은 대규모 통합 프로젝트와 국가 간 전력망 연결을 통해 비용을 낮추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기후 외교 전문가 제니퍼 모건 전 독일 기후특사는 “유럽의 청정에너지 접근 방식은 이제 기후가 아니라 비용과 정치의 문제로 전환됐다”며 “재생에너지가 경제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화석연료에 ‘올인’하는 사이, 유럽은 재생에너지를 에너지 안보와 지정학 전략의 핵심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반 데 그라프 교수는 “트럼프의 수사와 달리, 그의 정책은 오히려 유럽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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