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은 단 5년 동안 최소 2,5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대유행이 끝난 뒤에도 이 질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세기부터 세 차례의 팬데믹을 일으킨 뒤 오늘날에도 아시아·아프리카·미국 등지에서 매년 수 건씩 발생하고 있다. 그 오랜 생존의 비밀을 과학자들이 새롭게 규명했다.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는 최소 5,000년 동안 인간 사회를 순환하며 감염을 반복해 온 병원체다. 1347~1352년 유럽 인구의 최대 절반을 희생시킨 2차 팬데믹을 비롯해,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역병’, 19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3차 팬데믹까지 Y. pestis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지속적인 병원체로 꼽힌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는 이 병원체가 “구조적 변화 한 가지”만으로 ‘더 오래 살아남는 전략’을 진화시켜 팬데믹 이후에도 수백 년간 인간 사이를 떠돌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연구는 지난 여름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됐다.
병원률 낮추고 전파력 높인 ‘pla 유전자 감소’…100년 뒤 출현한 약화형 균주
캐나다 맥마스터대 고대 DNA 센터 연구진은 첫·두 번째 팬데믹이 시작된 지 약 100년 뒤 사망한 인간 유골에서 고대 Y. pestis 샘플을 수집하고, 당시 유럽·러시아·덴마크 지역의 균주 유전체를 재구성해 현대 균주 2,700여 개와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팬데믹 100년 뒤 등장한 Y. pestis 균주들이 공통적으로 ‘pla 유전자 사본 수가 감소’한 것을 확인했다.
▶pla 유전자는 병원체가 숙주의 체내로 확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효소(pla 단백질)를 암호화한다.
▶특히 혈전을 분해해 림프절로 빠르게 침투하도록 돕는 기능이 있어 흑사병을 극도로 치명적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실험용 쥐에 이 ‘약화형(pla 감소)’ 균주를 감염시키자, 생존률이 10~20% 증가하고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도 약 2일 더 길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덜 치명적이면서 더 오랫동안 숙주에게서 생존해 전염 기회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미주리대 수의병리학 교수 데버러 앤더슨은 “pla 감소는 2차 팬데믹 말기 감염력·치명률이 낮아진 현상을 설명하는 강력한 근거”라고 평가했다.
과거 인구밀도가 높았던 지역에서 페스트가 ‘폭발적 전파 → 급격한 사망’을 반복하자, 시간이 흐르며 덜 치명적이지만 오래 살아남는 변형이 선택되고 퍼졌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수학적 모델은 이를 ‘전염병 소진(epidemic burnout)’ 현상으로 규정한다.
이는 병원체가 숙주의 생존 기간을 연장해 더 많은 전파를 유도하는, 진화학적으로 흔한 전략이다.
고대와 현대 감염 고리를 잇는 단서…코로나19 이해에도 실마리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세한 Y. pestis 계통은 다시 '더 강한 pla 유전자를 가진 ‘고병원성 형태’'가 주도하고 있다. 연구진은 현대 샘플 2,700여 개 중 단 3개(모두 베트남에서 발견된 사람 1건·흑쥐 2건)만이 약화형 pla 변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즉, 약화형 균주는 결국 자연환경에서 우세성을 잃고 사라졌지만, 그 변화 과정은 수세기 동안 전염병이 어떻게 지속되었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연구를 이끈 라브니트 시두는 “고대·현대 데이터가 결합된 드문 연구"라며 “3차 팬데믹(현대 페스트)과 1·2차 팬데믹 사이의 진화적 빈틈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분석이 동물 매개 전염병의 재확산 가능성, 특히 들쥐·프레리도그 등 300종 이상의 야생 설치류 숙주에서 여전히 발생하는 현대 페스트 관리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연구진은 “병원체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며 배경에서 살아남는다는 점에서 코로나19 등 현대 전염병 이해에도 시사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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